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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가게가 되자
몇 해 전 일이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식당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발달장애가 있는 일행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몸을 아주 크게 움직였다. 흔히 발달장애인의 ‘문제행동’ 혹은 ‘과잉행동’으로 불리는 상황이었다. 우당탕탕. 잠시 식당은 소란스러웠다. 다행히 식사시간에 조금 비켜난 때라 가게엔 우리를 포함해 두세 팀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곧바로 매섭게 내쫓겼다. 황당하고 화가 나면서도 아주 약간 서운함도 들었다. 왜냐면 그곳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평소 자주 가던 가게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골’이었다. 누군가를 해한 것도 아니고 큰 사고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쫓아낼 것까지야 있나, 싶었으나 제대로 문제제기도 못한 채 쫓기듯 나왔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의 아버지는 “가게 조명이 어두워서 그랬던 것 같다”며 일행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권리를 주장하던 평소 그의 모습과 달리 주눅 든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내 곧 조명이 밝은 다른 식당을 찾아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가게 맨 구석에 웅크리듯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이후 그 가게에 가는 것이 꺼려지긴 했으나 안 갈 수는 없었다. 사무실 근처에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가게가 몇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일행 중에 휠체어 탄 이가 없었음에도 발달장애인과 함께 찾아간 것은 평소 그 가게가 ‘(휠체어 탄) 장애인’을 환대해주었기에, 거절당하지 않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장애인과 일행으로 함께할 때면 으레 따라붙는 눈초리가 있어 가게에 들어설 때 어쩐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그곳은 그러한 눈초리를 받지 않고 용기를 굳이 내지 않아도 되는 식당이었다. 그러나 휠체어 탄 장애인을 환대한다고 발달장애인도 환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음을, 그날 이후 느리게 깨달았다.
내가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내가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이 들 때, 사람은 위축되고 ‘우리’의 사회활동도 제약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접근성의 제약을 받는다고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계단 없이 경사로만 있는 가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가게만 갈 수 있다. 맛있는 곳을 찾기보다 접근 가능한 곳을 기준으로 가게를 선별해야 한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으로 ‘우리’의 생활 반경은 좁아진다. 그의 불편함이 나의 불편함이 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와 함께하는 것을 불편해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일행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빠질 수도 있다. ‘괜히 민폐 끼치지 말고 집에나 가자’ 하며.
이처럼 공간의 배제는 자연스럽게 관계의 배제로 이어진다. 공간의 접근성으로 우리는 함께할 누군가를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이 사회의 어떠한 요소들이 ‘우리가 함께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휠체어 탄 사람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주어 자리에는 상상보다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올 수 있다. 수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농인이 비(非)농인과 함께 학원에서 외국어, 제과제빵 등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을까. 카페나 식당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을 드러내며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가게는 어디일까. 비거니즘(완전한 채식주의)을 지향하는 사람은? 청소년은? 개, 고양이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가게는?
그러나 가게에 들어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휠체어가 움직일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며, 휠체어 이용자가 사용할 화장실도 물론 있어야겠다. 만약 근육 긴장이나 손떨림 때문에 빨대를 사용해야 하는 장애인이라면 뜨거운 커피 대신 미지근한 커피를 원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모양의 탑처럼 가득 쌓아 올린 빙수는 보기에 예쁠지 모르지만, 시각장애인이 퍼먹기엔 다소 어렵다. ‘가게’는 식당과 카페에 한정되지 않는다. 만약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목욕탕에 왔다면? 혹은 꽃집에 꽃을 사러 온 시각장애인에게 점원은 어떻게 안내할 수 있을까?
즉,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는 이 공간에 어떠한 이들이 올지를 상상하고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이 공간 구성에 반영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공간은 ‘누구’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는가?
‘차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
정체성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을 하나하나 나열할수록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가게가 과연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막막해진다.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차별 없는 가게’는 하나의 지향점이자 ‘차별하지 않겠다’는 불가능한 약속에 대한 선언이다. 차별 없는 가게의 조건을 따지는 것은 무엇이 차별인지를 서로 배워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독립예술창작집단 다이애나랩은 2019년 9월부터 서울 지역의 카페, 식당 등 31개의 가게로부터 이러한 약속을 받고서 ‘차별 없는 가게 지도’를 만들었다. 경사로가 있는지, 성중립화장실이 있는지 등을 아이콘으로 만들었는데, 무엇이 차별인지를 발견할수록 아이콘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하나의 우물만을 제 세계로 인지한다. 나는 저편에 있는 다른 세계의 우물을 알지 못한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발달장애인이 겪는 차별을 알지 못하고, 트랜스젠더가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이가 겪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여전히 포착되지 않는 차별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연재를 통해 내가 겪는 나의 차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여, 이 프로젝트는 영원히 미완성일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에게 덜 불편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그게 이 프로젝트의 목표이다.
단, 이 프로젝트의 한계점도 있다. 금전적 거래가 이뤄지는 가게를 대상으로 하기에 공공기관이나 공원과 같은 공공장소는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차별 없는 가게’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차별 없는 공간’이 되기 위한 고민에 영향을 미치기에 우리는 이 말하기를 멈추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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