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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갈동근
댓글 0건 조회 1,152회 작성일 21-10-2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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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 수어 아티스트가 농사회에 위협이 되는 이유

 

 한국수어가 농인들의 공용어로 인정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그에 뒤따라야 할 제도와 인식의 변화는 여전히 느리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수어는 농인들의 고유한 언어나 문화가 아니라, 여전히 단지 ‘손으로 하는 말’, 즉 수화로만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작 농인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는데, 청인들은 실력과 무관하게 수어를 사용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수어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의 필자는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농인과 수어를 위해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일지 고민하길 촉구한다.


작년에 우연히 후지모토 사오리의 기사를 접하게 되었고 읽은 순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관련 기사 : 어느 일본인의 고백 “위대한 한글, 지금의 나 만들었다”) 본인을 ‘수어 아티스트’라고 소개해서 농인인 줄 알았는데 청인이었다. 인터넷에 ‘수어 아티스트’를 검색하면 청인의 이야기들이 가득하고, 농인 수어 아티스트의 기사는 그에 비해서 아주 적다. 일반적으로 보면 일본인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수어까지 공부해서 한국수어 필기시험을 합격했다는 것은 박수를 보낼 일이다. 그러나 내 입장, 농인 입장에서는 이것이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현 우리나라 농 복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 우리나라 농 복지의 실태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가 10년 전에 비해서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지하철 교통비 무료, 영화관 50% 할인, TV 자막방송, 수어통역… 좋아졌다. 그런데 인권이나 문화권은 한 1% 정도만 나아진 것 같다. 한국수어가 우리나라 공용어로 제정된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수어가 공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즉, 대중화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 사회가 한국수어를 한국어와 동등하게 받아들이려면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수어 과목이 있어야 하며, 농 영·유아와 어린이들은 수어로 수업을 받아야 하며, 영화관에는 자막관이, 공연장들에는 수어통역사가 있어야 하며, 언론에서는 청인이 음성언어를 쓰듯이 농인은 시각언어를 쓴다고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수어에 대한 청인들의 인식이 ‘말 못하는 장애인의 것’에서 ‘시각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것’으로 바뀔 수 있다. 현재는 이 중에서 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농인은 사소한 일상에서도 짜증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 필자는 항상 손을 귀에 댄 다음에 흔들어서 ‘안 들린다’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눈치가 빠른 10% 정도의 직원들은 제스처 혹은 필담으로 대답한다. 하지만 나머지 90%는 내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입력하여 보여줘도 음성언어로 대답한다. 나중에는 그런 일들에 순응해서 청인 직원의 눈치를 보곤 한다. 여러분이 이런 경험을 매일 한다고 상상해보라.

직업은 또 어떤가? 우리나라 농인(청각장애인)이 대략 35만 명이 넘는데, 일자리가 가장 많은 공장을 제외하면 농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다. 농인 중에서도 전문적으로 공부를 마친 사람들이 있지만, 음성언어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 농인 중에서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경험을 수어로 표현하기에도 환경이 열악하다. 이런 상황에서 청인이 수어 아티스트를 직업으로 삼으면 농인들은 무엇을 먹고살아야 할까? 농인 수어 아티스트들의 커리어가 더 힘들어질 뿐이다.

무엇보다도 농인들은 청인 수어 아티스트의 수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농인이 사용하는 수어는 3D와 같다. 얼굴표정이 음성언어의 억양과 강조를 대신하여 관용적 표현도 생생하게 전달한다. 반면에 청인이 수어를 쓰면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다. 한국어 단어가 문장의 맥락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듯, 수어도 마찬가지다. 표정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청인의 수어를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단어 하나하나를 간신히 끼워 맞추는 퍼즐게임을 하는 것 같다. 농인은 24시간 수어를 사용해서 수어가 완전히 몸에 배어 있다. 제아무리 경력이 오래된 수어 통역사조차도 농인의 얼굴표정과 수어의 리듬을 똑같이 따라 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들로 우리 농인들은 청인 수어 아티스트의 수어 퍼포먼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농인 수어 아티스트들이 있지만, 언론은 수어 실력도 안 되는 청인만을 ‘수어 아티스트’라고 소개한다. 이처럼 실력이 없는데도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청인들이 가지는 특권을 보여준다. 이처럼 청인 수어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특권으로 장애인의 직업을 빼앗고 있다. 게다가, 청인들의 노래를 단지 수어로 표현한다고 그걸 ‘아티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청인 ‘수어 아티스트’는 농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서 이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부족한 실력으로 농인들의 직업을 빼앗는 것보다는 농인 수어 아티스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농인을 진정으로 돕는 것일 테다. 미국에서도 수어를 잘하지 못하는 청인들이 수어 수업을 담당하는 사례들이 있고, 이것은 농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많은 항의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수어가 농인의 언어이자 ‘공용어’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인 중심 사회의 문제다. 힙합과 재즈를 즐길 때, 한국인들은 그 음악의 뿌리가 흑인음악에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말로만 ‘수어는 공용어다’라고 할 뿐, 수어를 농인의 언어로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농복지도 열악하고, 수어에 대해 정당한 인식도 없는 실정에서 청인 수어 아티스트는 농인의 언어인 수어마저 빼앗을 우려가 있다.

이는 비단 ‘수어 아티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통역사도 마찬가지다. 언론들은 수어, 농 문화와 관련된 인터뷰를 할 때도 농인보다 청인 수어 통역사를 선호한다. 문제는 방송국 PD 및 관계자들이다. ‘유퀴즈(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한 권동호 통역사는 나에게 자신이 방송국이나 언론, 행사 주최 측에 농인을 추천해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농인과는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이유로 수어와 음성언어 사용이 가능한 청인 통역사를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농인 수어 아티스트, 농 수어 통역사도 있는데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은 모두 청인들에게 쏠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수어가 공용어로 인정받고 나서 오히려 청인의 직업의 기회만 더 많아진 듯싶다. 씁쓸한 현실이다.


- 진정 농인과 수어를 위한 길

이처럼 농 복지가 최악인 환경에서 청인이 수어를 직업으로 쓰는 일이 퍼지는 것은 농 사회에 위협적이다. 한국수어가 공용어가 되기 전에는 청인들이 통역사 정도로만 직업을 가졌었다. 하지만 한국수어가 공용어로 인정받은 지금, 청인들은 수어로 또 다른 직업을 만들어 본인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청인들은 수어로 직업을 갖고 주목받는데 정작 우리 농인들은 불안해하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농 복지가 발전하고 농인이 청인과 동등한 위치가 되면 그때는 농인들이 청인 수어 아티스트를 환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청인들이 수어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농인이 청인과 평등해질 수 있을지 고민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정 수어와 농인을 위한 길일 것이다.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19)